비둘기 같은 성령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성령의 상징은 비둘기입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은 우리 안에 머물며 예수님의 성품을 이루시는 성령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 시대가 시작되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며,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 위에 임한 비둘기 같은 성령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생애, 곧 공생애를 시작하게 하십니다.
노아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수 전의 시대가 있었고, 천지에 없던 큰 홍수 후에는 새 시대를 여는 비둘기가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노아에게 돌아옵니다. 심판이 끝났음을 알리고,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렇게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이후 30년 동안도 성령은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께 임하신 이후, 예수님은 그전과 확실히 구분되는 다른 삶, 다른 시대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후대에 그것을 공생애라 부릅니다. 이전과 확연히 다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
오늘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도 비둘기와 같으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성령은 우리 마음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거룩하게 머무십니다. 그리고 공동체와 모임 안에 평강과 하나됨을 이루시며,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삶에 머무는 한, 우리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다리는 불살라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비둘기의 임재 가운데 새 시대를 열어가며, 화해와 새 창조,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잿더미 속에서 돋아나는 새싹
캐나다에서 시작된 대형 산불 때문에 요즘 공기가 말이 아닙니다. 아들이 밖에 나가지 말라고, 부득이 나갈 때는 마스크를 쓰라고 몇 번이나 당부합니다. 대형 산불이 지나간 숲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잿더미 속에서 가장 먼저 작은 새싹이 올라옵니다. 그 새싹은 생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령께서는 인생의 잿더미 속에서도 새로운 감람나무 잎을 물고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잿더미같이 실패한 인생, 아무 별볼일 없는 폐허와 같은 삶 가운데서도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여실 수 있습니다.
화해와 하나됨을 이루시는 성령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 잎은 오래전부터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툼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용서하게 하시며, 교회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거친 바다를 건넌 사랑 이야기
노래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뉴질랜드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이 고향 생각에 부르던 노래로, 훗날 한국 가수가 ‘연가’로 개작하면서 국민가요가 되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이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그때는 그저 “비바, 비바, 비바람이 치는 바다…”로만 알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어 죽고 싶다는 고백, 그대가 이 거친 호수를 건너온다면 내가 이 거친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싶다는 애절한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아리아 부족 족장의 딸 히네모아와, 훠스터 부족 족장의 아들 투타네카이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무대는 뉴질랜드 북섬의 로토루아 호수와 그 안의 작은 섬 모코이아입니다. 거친 바다라는 지리적 장벽과 두 부족 사이의 오랜 반목이라는 인종적 장벽 아래서도 좌절하지 않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호숫가 육지에는 아리아 부족이, 호수 가운데 모코이아 섬에는 훠스터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부족은 오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아리아 부족 족장의 딸 히네모아는 어느 축제에서 들려온 피리 소리에 반했는데, 그 피리를 분 사람이 바로 모코이아 섬 훠스터 부족 족장의 아들 투타네카이였습니다.
신분과 부족 간의 반목 때문에 두 사람은 대놓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1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 때 멀리서 서로를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사실 투타네카이도 히네모아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이의 도움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집니다.
두 부족 사람들은 이를 눈치채고 감시를 강화했고, 특히 히네모아가 호수를 건너지 못하도록 카누를 모두 육지로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폭풍우 치는 밤, 히네모아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결심합니다. 몸에 갈대와 조롱박을 묶어 부력을 얻은 채, 차가운 밤바다를 홀로 헤엄쳐 건너 투타네카이가 있는 섬에 도착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투타네카이의 온천에 몸을 녹이다 마침내 두 사람은 상봉하고, 이 지극한 사랑에 감동한 두 부족은 오랜 반목을 끝내고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줍니다.
원곡 가사에는 이 전설 속 투타네카이가 히네모아를 향해 “소녀여, 난 사랑에 빠져 죽을 것 같다. 와이아푸의 거친 바다도 그대가 건너온다면 내가 잔잔케 하고 싶다”고 고뇌에 찬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두 부족의 반목으로 평소에는 만날 수 없고 1년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서, 보고 싶어 죽겠다는 절절한 한숨이 담긴 노래입니다.
이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두 부족의 반목을 끝내고 축복된 결혼으로 마무리됩니다. 비바람과 폭풍우, 아무도 볼 수 없는 밤을 틈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이를 향해 헤엄쳐 간 소녀와, 그를 맞이한 소년의 사랑은 두 부족을 감동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마음까지 뭉클하게 합니다.
성령이 알게 하시는 사랑
성령은 우리 마음에 비둘기같이 조용히, 평화롭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들 예수를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조금씩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반목하는 인생 대신,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사랑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사랑은 어떻게 압니까? 사랑을 받아봐야 사랑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참된 사랑을 주어야, 그 사랑을 받아보아야 사랑이 무엇인지 눈뜨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여러분이 사랑을 준 만큼 사랑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이 구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속죄 제물)로 보내심으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났고, 그로 인해 우리의 죄 사함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요한일서 4: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성령이 비둘기같이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는 마음의 분열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옛 마음과 옛 성품이 녹아지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조용히 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